인조이풀 문을 연 지 세 번째 여름이 지나고 있어요. 그동안 이 작은 공간에는 아이들과 보낸 계절들이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오늘부터 그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보려고 해요.
첫 번째로 꺼내는 이야기는, 색연필 앞에서 멈춰 있던 한 쪼이(저희는 아이들을 ‘쪼이’라고 불러요)의 봄과 여름입니다.
혹시 아이가 그림 앞에서 얼어붙는 모습, 보신 적 있으세요? 종이도 있고, 색연필도 있고, 다양한 재료들이 있지만, “그리고 싶은 거 그려도 돼”라고 말해줬는데도 손이 움직이지 않는 아이요.
색연필 하나가 그렇게 무거울 수 있을까
봄이었어요. 인조이풀에 처음 온 그 쪼이는 색연필을 드는 것조차 힘들어했습니다.
틀리면 어쩌지, 이상하면 어쩌지.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그림 앞에서 아이는 이미 평가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어쩌면 우리 어른들도 비슷하지 않나요.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면, 시작하는 것 자체가 가장 어려워지니까요.
저는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인조이풀은 잘 그리는 기술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내 생각을 꺼내는 즐거움을 맛보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그 즐거움은 누가 대신 떠먹여줄 수가 없더라고요.
아이가 스스로 첫 숟가락을 들 때까지, 어른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뜻한 식탁을 차려두고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날도 종이를 앞에 두고, 무엇을 표현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답을 주는 대신 작은 질문들을 건넸어요.
“여름이니까 — 여름 하면 뭐가 생각나?” “요즘 네가 좋아하게 된 건 뭐야?”
그러자 생각이 났다는 듯, 아이가 저를 올려다보며 물었습니다.
“클레이 해도 돼요?”
물론이지.
종이는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어요. 그 옆에서 아이는 클레이를 주물주물 — 만들었다, 합쳤다 하며 자기만의 컬러를 만들어냈습니다.
입술 같다며 입에 가져다 대어보고, 안경처럼 눈에 대어보기도 하고요.
종이 앞에서는 멈춰 있던 손이, 스스로 고른 재료 앞에서는 쉬지 않았어요.
표현할 재료를 스스로 선택하고, 무엇을 만들지 스스로 생각한 것.
저는 이 순간이 ‘그림을 완성한 날’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해요.
시작을 못 하던 아이가, 시작하는 방법을 자기 손으로 찾아냈으니까요.
그리고 다음에 방문했을 때, 아이는 그림도 그려보고 색칠도 해나갔습니다. 그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났어요.
색연필을 못 들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예요.
이제는 주제 하나만 주어도, 아니 주제없이도 아이들이 자기만의 생각을 쭉쭉 표현해냅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그림 실력이 늘어서가 아니에요.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인조이풀, 여기서는 틀린 답이 없다는 것, 색연필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 내 생각이 그대로 환영받는다는 것을 아이들이 몸으로 알게 된 거예요.
공간이 조용해지는 순간
『몰입』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의도적인 몰입을 3주 실천한 한 학생이 가치관과 삶의 태도까지 달라졌다고요.
자신이 몰두하는 일이 신성하게 여겨지고, 그 일에서 소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 — 그것이 몰입이 주는 커다란 행복이라고요.
아이들을 보며 이 말을 실감해요. 화려한 영상에 익숙해진 뇌는 웬만한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거든요. 몰입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푸욱 빠져보는 경험이니까요. 그런데 한 번이라도 몰입을 맛본 아이들은 다릅니다. 자기 작품을 만드는 손끝에 진지함이 배어나요. 웃고 떠들다가도, 어느 순간 공간이 조용해집니다.
저는 그 고요한 몇 분이 참 좋습니다.
아이가 자기 세계에 푹 잠겨 있는 시간,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시간.
색연필을 들지 못하던 그 쪼이도 이제는 스스로 고른 재료 속으로 들어갑니다.
봄에 멈춰 있던 손이 여름에 질문을 만나 움직였고, 그 작은 용기가 계절을 지나며 몰입이라는 열매로 자라났어요.
맛있게 드세요
‘맛있게 드세요’를 영어로 하면 enjoy예요. 인조이풀은 맛집이고 싶습니다.
행복의 맛, 사랑의 맛, 성장의 맛, 자유의 맛, 창조의 맛.
그중에서도 몰입의 맛은, 한 번 맛보면 잊을 수 없는 깊은 맛이에요.
색연필 하나 드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던 아이가, 이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립니다.
이것이 제가 인조이풀을 계속하는 이유예요.
오늘, 우리 아이들을 멈추게 한 것은 무엇인가요?
Pause. Sense. Create.

